상계별록(上系別錄)
경주(안강)노씨의 기세조(起世祖: 족보에서 1세)는 1601년 경암공(敬菴公: 諱 景任)께서 만드신, 최초의 우리 문중의 족보라 볼 수 있는, 「수본종보(修本宗譜)」이래 첨정공(僉正公:諱 從善)입니다.첨정공께서는 1430년(세종 12)년에 나셨으며 돌아가신 해는 미상입니다.족보에 세대(世代)로 연결할 수 없으나 관찬(官撰:관청에서 편찬한 책) 등 내용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몇 몇 선대(先代) 분들을 「상계별록(上系別錄)」이란 제목으로 이번 족보에 올렸습니다. 시조 한림공(諱 穗)와 득관조 휘 곤(坤)의 단(壇)은 광주의 삼능단에 있으며, 대광정승(諱 光漢) 산소와 그 외 10분의 단은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신송전에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수본종보(修本宗譜)」의 서(序)이며 첨부파일은 족보에 올린 「상계별록(上系別錄)」입니다.
족보편찬위원회
수본종보서(修本宗譜序)」
후손(後孫)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경임(景任)
내가 생각하니 사람들의 조선(祖先:조상)은 나무에 뿌리와 등걸이 있음과 같나니,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가지와 잎이 어디서부터 생기겠으며, 사람이 조선(祖先)이 없다면 자손(子孫)이 어디서부터 생기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가히 조선(祖先)이 어디서부터 내려왔는지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경주인(慶州人)이셨다. 멀리 신라(新羅)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여(千餘) 년 사이에 세대(世代)가 변천(變遷)하고 아득하여 고증(考證)할 수 없으니, 아! 역시 가히 슬프구나!
근대(近代)에 이르러서는 가히 알 수가 있으나, 가문(家門)이 쇠약(衰弱)하고 복조(福祚)가 비박(菲薄)하여 선군(先君: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큰 변란에 여러 형님도 잇따라 서거(逝去)하였으며, 아울러 문적(文籍)도 모두 없어졌으니 소자(小子)와 후생(後生)들은 장차 어느 곳에서 징신(徵信:믿음을 구하다)하랴!
아! 슬프구나! 후일(後日)에 이러한 세상의 변란(變亂)이 예측(豫測) 하기 어려운데 만약 자상(仔詳)하게 기록(記錄)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나의 후손들의 한탄(恨歎)은 오늘날보다 심할 것을! 이래서 내 마음에 이러한 것들을 잊을 수가 없으며, 나의 후손들로 하여금 먼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는 정성(精誠)과 친척(親戚)과 친밀(親密)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아! 나의 뜻이 더욱 슬프구나. 나의 후손들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라.
宣祖 34年(1601년) 신축(辛丑)년 正月 十五日에 씀.
註解
이 서문(序文)은 경주안강노씨(慶州安康盧氏)의 태생(胎生)을 역사적으로 가늠케 하는, 우리 선조께서 직접 적으신, 최초의 기록이다. 휘 경임(諱 景任:敬庵公 1569 선조2년~1620 광해군12년)께서 임진왜란 이후 그나마 기억으로 오대조(五代祖)까지 집안의 계보(系譜)를 기록한 가첩(家牒)의 서문이다. 이 가첩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나 내려오는 서문과 휘 종선(諱 從善:僉正公) 이하 육세(六世)까지 내용이 지금까지 우리 족보에서 상계(上系)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안강현(安康縣)의 휘(諱) 광한(光漢)의 후예(後裔)라고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1589년 출간)』의 편찬자(編纂者)인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손녀가 경암공(敬庵公)의 둘째 아드님인 휘 세양(諱 世讓)의 배(配)가 되시고, 이 책의 발문(跋文)을 적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질녀(姪女) 또한 경암공(敬庵公)의 큰 아드님 휘 세겸(諱 世謙)의 배(配)가 되시는 상황으로 보아 경암공(敬庵公)과 이 두 분이 아주 친밀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고, 이 서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신라 경주인의 후예(後裔)라고 적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적(文蹟)이 없어져 조상을 고증(考證)할 수 없음을 애석하다고 적으신 것으로 보아 그 전까지는 어떤 근거(根據)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그게 어떠한 내용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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