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공(노경임) 임진왜란 의병장 관련 논문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8-12-02 19:42:32 조회수 : 3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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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암공(敬菴公, 諱 景任)께서 약관 23세의 나이로 의병장으로 활동하셨다. 아래의 글은 2016년 구미에서 열린 ‘임진란사 학술대회’에서 금오공대 박인호 교수가 발표한 논문 ‘임란기 구미 지역의 사족 동향과 의병 활동’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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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지역은 1592년 8월15일 상산(지금의 상주)으로 피난 가 있던 노경임(盧景任)이 셋째 형인 노경필(盧景?), 박수일(朴遂一), 길운득(吉云得), 최현(崔晛) 등 여러 사람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 선산 의병은 노경임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며, 박수일이 부대장, 최현이 장서를 담당하였다. 노경임은 〈향병약속문(鄕兵約束文)〉에서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직분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향병약속문(鄕兵約束文)
『敬菴集(盧景任)』 권9, 「잡저」
『認齋集(崔晛)』 권9, 「잡저」
선산향병장 노경임은 등은 고을 어르신, 사림, 관리, 백성을 모아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여 알린다. 나라의 도적을 토벌하고 임금의 원수를 갚는 것은 대의로 환한 것인데 누군들 이와 같은 마음이 없겠는가. 경임 등이 스스로의 역량을 생가가하지 않고 감히 동지들을 규합하여 큰 어려움을 평정하고 깊은 수모를 설욕하고자 한다. 오호! 성패는 거꾸로 예측하기 어려워도 직분은 다함이 마땅하다. 아 우리 동지들이여! 한 마음과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군율로 다스리겠노라.
해평에 기반을 둔 노경임 의병은 10월 토적을 체포하여 당시 해평으로 건너와 머물고 있던 선산부사 정경달에게 고하였으며, 11월에는 선산부사에게 군사와 식량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선산부사는 의병장 박수일과 노경임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1592년 보은 마래(馬來)에서 충청좌도 및 경상우도 각 관원과 의병장이 회동하여 군사 대책을 마련할 때 선산부사 정경달과 함께 숭의장(崇義將) 노경임도 이에 참여하였다.
1593년 선산부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어 1월 15일 순찰사가 관문을 내어 정경달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선산·상주·함창·문경 관군과 선산·상주·함창·산양의 의병 등 8진의 장령으로 하여금 정경달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 상주판관 정기룡을 부장으로 삼고, 상주목사 이하 모두 대장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여러 장수들이 병을 칭탁하면서 군관들을 보내 장수 노릇을 하도록 하면서 실패하여 24일 본고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때 참여한 선산 의병을 숭의군으로 기록하고 있음에서 볼 수 있다.
노경임이 선산에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왜적들이 상주로 나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도록 하였다. 이재(李裁)도 행장에서 상주로의 길을 막아 왜적들이 마음대로 다니고 노략질을 못하게 된 것은 실로 공이 창의한데 힘입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1593년 봄 승문정자(承文正字)의 명을 받아 서울로 떠나가면서 의병 참여는 그치게 되었다.
노경임이 1593년 봄 서울로 떠나면서 뒤를 이어 의병을 이끈 것은 최현(崔晛)이었다.”
족보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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