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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종중(華林宗中)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24 19:44:04       조회수 : 3978 파일 :

화림(華林)1700년대 후반에 조성된 마을의 지명이며, 지금의 구미시 도개면 신림리입니다.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늑정공파(?亭公派) 10세 죽월헌(竹月軒) () 계정(啓禎)께서 마련한 터에 부사(府使)를 역임한 그의 손자인 11세 서산와(西山窩) () 상추(尙樞)께서 집을 짓고 식솔들을 데리고 이주해서 그 곳의 이름을 화림이라 하였고 그 이후 그 곳에서 번성한 후손들을 칭하여 화림종중(華林宗中)이라 합니다.

서산와(西山窩) () 상추(尙樞)께서 쓰긴 68년간의 일기와 당시 교유한 분들과의 간찰(簡札:편지) 74점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우리 경주(안강)노씨와 이 분의 가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많아, 우리 경주(안강)노씨에 대한 소략한 설명이 될까 하여 유형 문화재 신청서에 기록한 내용을 조금 첨삭하여 올립니다.

아래의 메일로 좀 더 궁금한 사항을 보내 주시면 성실히 답변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gjangnoh@naver.com

 

관리자 배상

 

노상추 가계도

-경주(안강)노씨-

 

경주(안강)노씨(이하 경주노씨)의 가계는 15세기 중반 노종선(盧從善)[1430∼?] 이후 18,9세기 노계정, 노상추를 거쳐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500년 이상 선산(善山) 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경주노씨 선산 입향조는 조선 초 명나라와의 외교 쟁점인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에서 처형된 노인도(盧仁度)의 부친 노한(盧?)으로 알려져 있으며 족보상의 기세조(起世祖)는 노종선(盧從善)이다. 노종선은 영남사림파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한훤당 김굉필과도 교류하였다고 전한다. 관력(官歷)으로는 세조·성종 때 이원 현감과 군기시 첨정을 역임한 뒤 선산으로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세거지이자 묘소는 금오산을 마주하고 있는 선산 봉곡리(지금의 구미시 봉곡동)에 있었으나 최근 개발로 인해 묘소는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로 이장하였다.

노종선의 장남 2세 소종(紹宗)은 무관직인 충무위 사직을 지내다가 무오·갑자사화 때 향리에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소종의 아들 3세 관(?) 역시 부장을 역임해 무반직을 대대로 이어갔으며, 이때 선산 문동(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관은 한훤당 김굉필에게 수업하여 재행으로 천거되었으며, 그의 아들 4세 희식(希軾)은 신당 정붕 문하에서 종유했고 동래교수를 지냈다.

노희식의 아들 5세 수함(守?)은 당시 선산지역의 거유(巨儒) 송당 박영에게 배웠고, 1540(중종 35) 진사시에 합격해 문명을 떨치면서 명문 옥산 장씨 여헌 장현광의 맡 누이를 후배(後配)로 맞이할 수 있었다. 수함은 경주노씨를 선산에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조선 중기의 중흥조(中興祖)이다.

송암 노수함은 6명의 적자(嫡子)를 두었는데 3자 역정(?亭) 경필(景?), 5자 역락재(亦樂齋) 경륜(景倫), 6자 경암(景菴) 경임(景任)이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 경필은 한강 정구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며 23세에 향천으로 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임진왜란 발발 후 1594(선조 27)에 안기도 찰방으로 임명되어 쇠잔한 역()을 소생시키는 공을 세웠다.

5자 경륜은 1566(명종 21)에 문동에서 태어나 한강 정구를 사사했다. 26세에 향시에 입격했고, 임난 시 모부인(母夫人)과 가솔들을 대동해 의성·상주 등으로 피난살이를 하며 가문을 지켜나갔다. 안동 임하 도심촌에서 피난 살 때 겸암 류운룡과 한 동리에 우거하였던 인연으로 동생 경임이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시기 경주노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6자 경임(景任)이었다. 1569(선조2) 선산 문동리에서 태어난 경임은 외숙인 여헌 장현광과, 후에 처숙(妻叔)이 되는, 서애 류성룡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591(선조 2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분관(分官)되었다. 임진왜란 때 창의 거병하였고, 승문원정자·저작 등을 역임 후 1594(선조 27)에 공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에도 병조좌랑·정언·지평·교리 등 내직과 예천·풍기군수, 성주목사 등 외직을 두루 거쳤다. 정인홍과의 반목으로 낙향 한 뒤 낙동강 가에 영귀정이란 정자를 짓고 학문으로 소일하고 외숙 여헌 장현광, 인재 최현 등과 금오서원 이건(移建)을 주도하는 등 향촌 사회의 일을 보면서 지내다 1620년 향년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도승지로 추증되었는데 노계정, 노상추가 무과로 입신하기 전까지는 선산에 거주하는 경주노씨 일문에서 가장 현달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노수함의 6자 중 후손이 이어진 위의 3자가 오늘날 경주노씨 주류를 이루는 선산의 역정공파(경필), 역락재공파(경륜), 경암공파(경임)의 파조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삶의 터전을 선산문동(독동리)에서, 해평 숭암(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도개·화림(지금의 구미시 도개면 신림리) 등지로 확장하면서 중종 활동을 펼쳐 나갔다.

노수함의 후손 중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많이 하였던 소종(小宗)은 늑정공파이다. 바로 68년간 일기를 쓴 서산와 노상추가 역정공파의 일원이다. 그의 조부인 죽월헌(竹月軒) 노계정(盧啓禎)1725(영조 1) 증광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판관, 박천·선천 등지의 군수로 재직하였고, 위원 군수 시 어사의 포폄(褒貶)으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741(영조 17) 에는 전라도 우수사를 거쳐서 경상도 좌도병마절도사에 이르기까지 무관으로서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그의 손자 노상추는 영조 시 노계정의 공업(功業)으로 정조로부터 파격적인 승진(昇進)과 신뢰를 받는다는 기록이 왕조실록과 일성록 등에 있다. 노계정의 영향으로 손자 노상추를 비롯해 그의 직계 후손들에게서 무과 급제자가 집중적으로 배출되는데, 노상추를 포함해 4대에 걸쳐 11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무반(武班)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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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일기(先考日記)』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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