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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안강노씨 종중의 형성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5 11:39:09       조회수 : 407 파일 :

아래의 글은 선산의 안강노씨(송암공파) 형성에 관한 글입니다. 종중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입니다.

관리자

■ 선산 안강노씨 종중의 형성

안강현의 토성에서 출자한 안강노문이 언제 선산에 정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을 보면 고려 말에 출사하여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고, 1392(태조 4)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에 갔다가 죽임을 당한 노인도(盧仁度;1364~1396)의 출신지가 선산, 본관이 안강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의 아들 노호(盧浩와 손자 盧晉諧의 출신지, 본관도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노인도의 부친 노한(盧?)이 안강노문 선산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이로 보아 이들은, 족보에는 세대(世代)로는 입록(入錄)되어 있지 않지만, 14세기 후반 선산에 이거한 선산 입향조 세대인 것으로 보이며, 당시 흔히 보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른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6·17세기 선산지역에서의 성리학 전개는 안강노문이 재지사족으로 정착하여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성리학 도통관은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으로 정립된다. 이 중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은 선산 출신이거나 선산에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다. 즉 성리학이 조선에 안착하는 데 선산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선산에서는 박영(朴英;1471~1540)과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송당학파(松堂學派)가 형성되었고, 이 학파가 16세기 초·중반 조선의 학문과 정치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김굉필의 문인인 정붕(鄭鵬;1467~1512) 문하에서 수학한 박영은 영남을 넘어 호서에 이르는 다양한 지역 출신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중에서도 선산 출신 제자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노수함(盧守?), 박운(朴雲), 김취성·취문(金就成·就文) 형제, 최응룡(崔應龍), 최해·(崔瀣·) 형제 등이 고제자로 16세기 중반 지역의 학풍을 주도하였다.

성리학적 의례에 따른 적장자 중심의 부계 친족집단은 16세기 과도기를 거쳐 17세기 중엽에 어느 정도 정착한다. 안강노문이 성리학적 친족집단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송당학파의 핵심 인물이자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자형인 노수함 대부터이다. 유년기의 장현광은 노수함의 3자 노경필과 함께 자형에게 글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노경필은 김취문의 손자이자 장현광의 문인으로 활동한 송당학파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김공(金?)을 사위로 맞이했다.

이후 송당학파는 대학자로 성장한 장현광에게 흡수되는데, 안강노문에서는 5이 입문한다. 안강노문에서 5명이 입문한 것은 척연(戚聯)과 관련이 깊다. 특히 노경임은 류운룡(柳雲龍)의 사위가 되면서 처숙인 류성룡(柳成龍)에게도 사사하였다. 류운룡?성룡 형제는 김공의 외숙이기도 하다.

이렇듯 안강노문은 송당·서애·여헌학파(松堂?西厓?旅軒學派)와 학연(學婚)으로 연결되어 선산의 주요 사족으로 자리를 잡는다. 학문적 유대와 혼인을 통한 관계 성립은 안강노문의 정체성으로 정립되어 19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성리학적인 사회 규범이 정착되는 17·18세기, 조선에서는 제사와 가계 승계를 위한 입후가 정착하는 등 친족제도가 변화한다. 특히 적통주의에 입각한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 되면서, 이전까지 관례적으로 허용되던 형망제급과 서자의 승계를 배제하는 양자제가 공식화된다.

안강노문의 기가조(起家祖) 노수함은 두 명의 부인에게서 6명의 적자와 2명의 서자를 두었다. 전처인 전의이씨와의 사이에서는 장자 노경준, 2자 노경인(1533~1593), 3자 노경필을, 후처인 인동장씨로부터는 4자 노경건(1564~1593), 5자 노경륜, 6자 노경임을 낳았다. 이외에도 서자로 노경전과 노경동이 있었다.

그러나 장자 노경준은 적자 없이 서자만 두었다. 노수함은 1572, 노경준은 1577, 노경필은 1595년 각각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 대외적으로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해 혼란스런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노경필의 사후 노세효가 입후 되어 봉사할 때까지, 1627[94]까지 생존했으며,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인동장씨가 제사를 주관했던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30여 년 정도 안강노문에 봉사자(奉祀子)가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16세기에 접어들며 조선은 성리학적 친족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기존의 질서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이에 봉사자인 적장자가 아들이 없을 때, 그의

처가 주제(主祭)하고 계후자(繼後子)를 지명하는 권리인 총부권(?婦權)’을 갖는 제도가 출현한다. 이것은 당시 소가족이었던 현실과 여성의 봉사 및 입후가 가능했던 관행에 기인한 것이다. 부계 계승자 지명권은 적계를 통한 종통 계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족들에게 큰 지지를 받아 종법질서를 안착시키는데 유용한 방안이었다.

이에 따라 안강노문에서 총부권을 갖고 있었던 인동장씨는 장자인 노경준이 사망하자 형망제급으로 3자 노경필을 봉사자로 지명하였다. 노경필은 전처 전의이씨의 소생으로, 장현광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20세에 사마시에 입격 후 참봉으로 천거되었다. 또 임란 시 동생 노경임과 함께 의병 활동을 펼쳤으며, 1595(선조 28) 안기도 찰방으로 재임하던 중 임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를 승계자로 결정함에 있어 전처소생이라는 정통성과 향촌사회에서의 위상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노경필에게도 아들이 없자 인동장씨는 이번에도 다시 총부권으로 본인 소생인 노경륜의 2자 노세효를 노경필에게 입후하여 봉사하게 했다. 노경륜은 임란 때 노모와 식솔들을 이끌고 봉화 춘양의 도심촌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등, 당시 실질적인 가문의 경영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아가 노세효는 그 항렬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장현광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노세효]이라 말하였고, 같이 어울리는 모든 선비들은 덕망 있는 사람이라 평하였다. 이어 노경임은 모친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제사를 이을 만하다.’라 호평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인동장씨는 동생 장현광의 지지와 가문에서 가장 현달한 노경임의 동의를 얻어, 본인의 소생인 노세효로 하여금 종사(宗祀)를 잇게 한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이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첫째 종6대조 처사공[노경준]은 적실에게는 자녀가 없고 단지 얼자인 동령 한 사람만 있었는데, 늑정공[노경필]이 어머니 장씨의 명에 따라 형망제급으로 종가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집의공[노세효] 또한 늑정공의 후사(後嗣)를 이어서 종통이 또한 6세를 전하였다.  

『노상추일기  1803(순조 3) 117

이러한 승계가 가능했던 것은 노수함과 그의 아들들이 활동하던 17세기 전·후가 일종의 과도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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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안강노씨 종중 형성
『선고일기(先考日記)』의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