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맹신(盧盟信)의 우향계안(友鄕契案)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06-08 00:18:38 조회수 : 4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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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맹신공(盟信公)의 인적 사항이 올려져 있는 우향계안(友鄕契案)에 대한 글이다.
족보편찬위원회
우향계의 성립과 변천,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37만여 점에 이르는 자료 중에는 흥미로운 계모임 기록들이 많다. 그 중에서 『우향계안(友鄕契案)』이라는 이름의 기록은 1478년(성종 9)에 시작되어 1903(광무 7)까지 430년간 이어진 우향계(友鄕契)의 기록을 담고 있다. 계의 시작은 고성 이씨인 이증(李增1419~1480) 등 안동의 5개 성씨( 안동권씨(安東權氏), 흥해배씨(興海 裵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영양남씨(英陽南氏), 안강노씨(安康盧氏))선비 13명의 모임이었다. 충절의 인물이 많고 뛰어난 산수의 고향에서 벗들이 모여 자연 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서로 도의로써 인격도야를 면려하고 풍속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우향(友鄕)’이란 이름은 “한 고장의 선한 선비라야 그 고장의 선한 선비와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는 『맹자』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
이들은 이날의 계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계축(契軸)13부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삼단으로 된 계축의 맨 위에는 ‘우향계축(友鄕契軸)’이란 제명이 있고, 중간에는 당시 문호로서 명성이 높았던 서거정이 지은 칠언(七言)의 축시가 자필 초서로 쓰여 있으며, 그 아래에는 계원 13명의 인적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계축 원본은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齋) 권벌(權撥 1478~1548) 집안에 전해오고 있는데, 계안을 첫머리에 그대로 옮겨 적고 이어 140면에 걸쳐 역대 계모임 관련 계안과 기념시 그리고 참석자 명단 등의 기록을 싣고 있어 430년에 이르는 우향계의 확대,전승 과정을 난 눈에 보여주고 있다.
우향계원들이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손 15인이 1502년(연산 8) 안동 영호루에서 진솔회(眞率會)를 결성해 우향계를 이었고, 그 2백년 후인 1702년(숙종 28)에는 63인의 후손들이 세호계(世好契)로 이름을 바꾸어 모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화난상규(禍難相求) 등의 일을 한결같이 여씨 향약에 따른다.”는 등 총 9개 조항의 규약을 갖추었다.
계는 1865년(고종 2)에 다시 수호계(修好契)로 이름을 바꾼 이래, 거의 1~2년마다 5개 문중의 재실이나 의성의 고운사(孤雲寺) 등 인근 사찰을 돌아가며 열렸다. 특히 최초의 우향계 모임으로부터 7주갑이 된 1898(광무 2)의 계회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에서 1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향계안’의 기록은 1903년 광흥사(廣興寺)에 모여 문서를 닦은 사실과 참가자 69인의 명단을 적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도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
‘우향계안’의 기록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지금도 증보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근대 이후 후손들이 우향계라는 당초의 이름을 회복하고 계속 모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회에서는 옛 법도애로 전작(奠爵;돌아가신 분에게 술을 올리는 예)과 독약(讀約;항약 조항의 낭독)을 행하는데, 달라진 것이라고는 전작 대상이 공자 등 중국의 성현에서 13인의 우향계 창립 선조들로 바꿘 것뿐이다. 또한 우향계 모임에서는 앞으로 또다시 5백년을 이어가기 위해 안동댐 인근에 계회를 위한 공간인 우향각을 건립했다. 이 ‘우향계안’을 보고 있노라면 ‘유구한 문화’라는 말이 비로소 마음에 닿는다. 도한 계회라는 세련된 문화형식을 통해 생물학적 유한성을 넘어서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낸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할 따름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식지 `예던길` 2013년 봄(통권23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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