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선산(善山)고을의 읍지(邑誌)인『숭선지(嵩善志)』를 찾았다."
이택용/구미 향토 사학자
읍지(邑誌)에는 관찬읍지(官撰邑誌)와 사찬읍지(私撰邑誌)가 있다. 국가에서 지리지를 편찬하는 전통은 국가에서 지방을 파악하려는 시도로서 일찍이 중국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또 고을마다 읍지편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지방통치자가 그 지방의 지리, 풍속, 인물, 역사, 산업 등의 그 지방의 사정을 모르고는 백성을 옳게 다스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쓴『한서(漢書)』에 지리지가 있으며, 이러한 체제는 역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도입되어『삼국사기(三國史記)』나『고려사(高麗史)』에도 지리지가 포함되어 있다.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문물, 제도의 정비, 국가통치 자료의 파악을 위한 목적에서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그 결과 1432년(세종 14)에『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각 도별 지리지 가운데 1425년(세종 7)의『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남아 있어서 전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세종대에 편찬된 지리지를 실록에 수록한 것이『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세조대에도 지리지를 편찬하는 노력은 지속되어 1477년(성종 8)에『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가 완성되었다. 이 지리지도 역시 전하지는 않으나『팔도지리지』의 기초자료로 1469년(성종 1) 간행한『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가 전해지고 있다. 이『팔도지리지』에『동문선(東文選)』의 시문을 각 군 ? 현별로 편입하여 완성한 것이『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다.『동국여지승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지리지라고 할 수 있다.『동국여지승람』은 1484년(성종 17)에 편찬되었고 이를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에 완성한 것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전기 지리지 편찬사업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찬팔도지리지』 → 『경상도지리지』 → 『세종실록지리지』계통의 세종대의 지리지와『팔도지리지』 → 『경상도속찬지리지』 → 『동국여지승람』으로 이어지는 성종대의 지리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세종대의 지리지가 호구(戶口) ? 전결(田結) ? 군정(軍丁) ? 토의(土宜) ? 공물(貢物) 등 경제 ? 군사 ? 행정적인 측면이 상세하였던데 반하여, 성종대의 지리지는 인물(人物) ? 예속(禮俗) ? 시문(詩文) 등 문화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전국적 지리지의 편찬은 개별읍지의 편찬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개별읍지의 형태로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읍지는 거의가 없다. 기록상으로는 음애(陰崖) 이자(李?)가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1507년(중종 2)에 편찬한 의성읍지인『문소지(聞韶志)』가 최초의 것으로 확인된다. 각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읍지가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후반이다.
선산고을도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이 저술한『숭선지(嵩善志) 1冊(20張), 四周雙邊 半郭 24.6 x 17.5 cm, 烏絲欄, 12行 24字 註雙行, 無魚尾 : 32.7 x 22.5 cm 』가 있었다는 기록은 경암선생문집(敬菴先生文集)에 서문이 있고, 동서(同壻)인 상산김씨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의 문집에 제숭선지(題嵩善志)가 있으며, 훈지양선생문집(塤?兩先生文集)에 훈수(塤?) 정만양(鄭萬陽)의 제숭선지후(題嵩善志後)와 지수(??) 정규양(鄭葵陽)의 숭선지서(嵩善志序)가 있어서 늘 발견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서울의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숭선지』초고본(草稿本)이 있다는 자료를 접하고 그날은 반가움에 하루 종일 싱글벙글 혼자 웃고 행복하였다. 1601년(선조 34) 1월 마지막 날에 노경임이 서문을 써 남긴『숭선지』를 1727년(영조 3)에 책으로 출판하고자 초고본을 만들고 노경임의 사위 의성김씨 경와(敬窩) 김휴(金烋), 김휴의 사위 선성김씨 수분재(守分齋) 김덕일(金德一)이 6월 15일 발문을 쓴 초고본이다. 인재(?齋) 최현(崔晛)이 저술한『일선지(一善志)』보다 먼저 간행한 읍지이다.
향토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서울의 박물관을 3차례 방문하였으나 사립이라 열람을 하지 못하였다. 아쉽고 기대가 아주 높은『숭선지』가 구미로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