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철일기』1 |
| 작성자 : 노용순 |
작성일 : 2025-12-08 20:22:03 조회수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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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8월 11일(기유) 맑음.
육대조(노철로부터..) 송암공松庵公[노수함]은 송당松堂 박영朴英 선생에게 수학하여 제현들에게 추대를 받았다. 지금은 대진代盡(제사를 지내는 댓수가 다됨)이 되었다. 단지 서파庶派만 있기에(노수함의 장남 노경준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다는 의미이다) 최장방 자손(제사를 지낼 수 있는 댓수 내의 후손 중 가장 항열이 높은 사람. `聖`자 항열이다)이 제사를 모셨고, 별묘 건립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 공의公議로 늑정[노경필]과 학관[노경륜] 두 선조를 송암공과 병향하자는 고을의 논의도 오랫동안 있었지만 자손들이 제사를 받들 겨를이 없어서 여태 미뤄둔 상태였다. 그런 뒤 지금에야 비로소 별묘別廟를 설치하여 훗날을 기다릴 생각으로 오늘 연향延香의 목수 윤경신尹庚申을 불러 별묘를 조성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1742년 6월 초9일(병신) 흐리다가 아침 뒤부터 비로소 볕이 나더니 오후에 다시 흐려지고 밤에 비가 옴.
송암 선조의 도덕과 학문은 양당兩堂(신당 정붕, 송당 박영) 노老 선생의 정론正論을 가르침 받아 김진락당金眞樂〔김취성)과 박용암朴龍巖〔박운〕 등 제현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성리性理를 연구하고 널리 배워 도道를 성취하여 늑정, 학관, 경암敬庵〔노경임〕 선조들의 학업에 전수했다. 장여헌張旅軒〔장현광〕도 인척 관계의 가까운 사람으로 늑정공과 동년배이며 9세 때부터 송암 문하에서 수업하여 약관의 나이도 채 되지 않아 성리性理를 배우는데 뜻을 두었다. 명성이 일찍 알려져 나이 경우 18세에 늑정공과 박건재朴健齋〔박수일〕 세 현자가 고을 인재로 추천을 받았으니, 전수傳受하고 개익開益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자는 의론이 일어난 지 오래되었지만 의론을 완수하지 못했던 것은 가문의 화禍[노이익의 갑술환국 때의 화]가 그 사이 일어나 자손들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지금 외손들이 논의하여 다시 사당을 세우는 논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노계정]께서 스스로 경영하여 별묘別廟와 재실을 건립했지만 미처 옮겨 봉안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또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부임하여 예를 거행할 겨를이 없어 날을 보내다가 이번 19일로 길일을 잡아 봉안할 계획이다. 그러나 사판祀版을 아직 매안埋安하지 않은 것은 최장방最長房이 아직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公議를 일으켜 사당을 세우고 봉안했다면 당시 신주를 무덤 앞에 묻는 것은 자손의 사정이다. 양가養家에서 신주를 다시 쓰고 길제吉祭 또한 28일로 정했으나 마을이 불안(전염병)하니 이 때문에 염려가 된다.
『1742년 6월 19일(병오)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오후 늦게 그침.
풍산 족형[노척]과 수월에 도착하니 예천 족숙[노창운]과 평리 재종숙[노계영]이 오셨다. 사판祠版을 받들어 모셔오니, 바로 송암松庵 선조와 비위[전의 이씨, 옥산 장씨] 두 분 모두 세 분이다. 강을 건너(낙산의 노경임 후손 집에 위패가 있었다) 문동文洞에 도착하여 별묘別廟의 감실龕室에 위패를 봉안했다. 수영水營[전라우수영, 수사水使 노계정]에서 별도로 만든 색으로 3면을 짙게 단청을 하고 기다리다가 정오에 봉안 제사를 지내고 고유告由했다. 제수는 집에서 준비해 제공했다. 음복한 뒤 회원들이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자 가까이 있는 내외 자손들이 모두 모였다. 오후에 비가 내리다가 저물녘 그쳤다. 내일이 바로 늑정 선조 기일이기 때문에 제수를 마련하며 재숙齋宿했다. 척장戚丈 정제신丁悌愼 씨와 평리 재종숙再從叔이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러 묵었다.』
해설)
1740년 노수함의 제사가 대진代盡되어 별묘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고, 그때 노경필과 노경륜을 별묘에 같이 모시자는 논의도 있었다는 내용이다. 후손들은 공의公議로 노수함의 제사를 일종의 불천위(비공인이지만..) 제사로 하겠다는 의지로 보여진다.
1742년 별묘가 완성되어 노수함과 두 배위 전의 이씨와 옥산 장씨의 위패를 모셨다는 내용이다. 이 당시 5대손 노계정이 영조의 신임으로 무신으로 승승장구할 때여서 많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향촌의 사족들은 입향조 등 현달한 조상을 기점으로 종중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선산의 안강노씨는 노수함의 별묘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종중을 형성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노계정과 같은 성공한 후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용순